편지는 말로나 전화로 직면하기 면구스러울 때 속마음을 풀어주는 소통의 창구가 되어준다. 20여 년 전, 마음에 상처를 입힌 동료가 있다. 우리는 좋지 않은 감정을 안은 채 긴 세월동안 잊고 지냈다. 세월이 약이라 했던가. 뜻밖에 그에게서 우표를 업은 손편지가 배달되었다. 설레는 마음을 안고 조심스럽게 개봉한다.
“K님! 오랜만입니다. 그간 안녕하신지요. 오래전부터 몇 번이나 사과해야지 망설이다가 오늘에야 용기를 내어 필을 들었습니다. 지난날 저의 옹졸한 처신으로 K님의 심상에 아픔을 주었던 S입니다. 죄송한 마음을 담아 용서를 빕니다…….”라고 진솔하게 눌러 쓴 2면에 달하는 장문의 손편지다.
S님의 지난 날 모습을 그리며 꾸밈없는 민낯의 손편지를 한 구절 한 구절 읽으며 손편지의 위력을 실감한다. 편지 한 통으로 닫힌 마음이 활짝 열리고 가슴이 뜨거워지면서 잠재 체증이 봄눈처럼 녹아내린다. 먼저 사과 편지를 보내지 못한 속 좁은 내가 부끄럽다. 감동을 안고 답신을 쓴다.
“S님! 감사합니다. 제가 부덕하여 S님의 마음을 상하게 하였습니다. 먼저 사과드려야 하는데 늦어 죄송합니다. 본성이 따뜻하고 속 깊은 S님을 다시 얻게 되어 잃어버린 보물을 찾은 느낌입니다. 새롭게 이어진 우리의 관계가 더욱 튼실하고 아름답게 피어날 것을 믿습니다…….”라는 나의 솔직한 심경을 지면 가득히 손편지에 담고 우표를 입혀 우체통에 넣었다. 핸드폰이나 문자메시지로 대신하기 어려운 인간관계의 숙제를 우표와 함께한 손편지가 풀어주었다. S님의 너그러움에 경의를 표하며 재삼 감사한다.
편지와 우표는 사랑나무다
몇 년 전, 섬 기행 중 외연도의 천연기념물 136호인 상록수림에 왔다. 100살 넘은 동백나무 두 그루가 5미터쯤 떨어져 각기 다른 뿌리를 갖고 있으면서 서로 다른 두 나무의 큰 가지가 이음매 없이 한 나뭇가지처럼 신기하게 연결되어 연리지가 된 사랑나무를 만났다. 우표와 손편지의 궁합을 보는 것 같다. 편지봉투 위에 붙은 우표 한 장은 많은 것을 함축한다. 아무리 정성껏 손편지를 썼다 해도 우표가 아닌 다른 증지가 붙어온다면 감동은 체감된다. ‘손편지는 무상으로 얻는 감동의 별미이고, 우표는 다양한 심의(深意)를 그려 넣고도 가장 작은 그림’이라는 연계성을 지닌다.
이들은 사랑나무처럼 한 가족이 된 시의(時宜)의 동반자다.
편지는 묵언의 언변이고,
우표는 가슴의 심부름꾼.
편지는 사유하는 언어의 울림이고,
우표는 편지의 전령.
편지는 체온을 덥히는 군불이고,
우표는 기별을 전하는 천리향.
그리움에 지쳐 심신이 차가울 때,
편지는 속옷이고 우표는 두루마기.
편지는 사색하는 시인이고
우표는 봄을 배달하는 삼월
편지는 제비를 치료해준 흥부이고
우표는 박 씨 물고 온 제비
우표와 함께하는 손편지는 느림의 미학이다
느림은 게으름이 아니고 빠름은 부지런함이 아니다. 디지털 초스피드시대에 우표와 함께한 손편지는 구시대의 유물일까. 우표를 업은 손편지는 감동 없이 빨리빨리만 추구하는 시대에 조급증을 완화하고 감성을 배달하는 느림의 매력이다. 느림 속에 낭만과 여유가 있고 사유가 있다. 알프스 산 중턱에 시원스레 뚫린 도로의 양옆은 아름다운 꽃들과 울창한 나무들로 가득하고 온갖 나비가 춤추는 멋진 풍경을 뽐낸다. 도로 입구에는 “천천히 가면서 즐겨보세요”라는 표지판이 있다. 이는 자연이 연출한 풍경을 감상할 여유를 놓치고 서둘러 목적지만을 향하는 이들에 대한 충고 메시지다.
느림은 많은 것을 보고 느끼고 들으며 더 멀리가기 위한 휴식이다. 오늘날의 빨리빨리 시대에 스티커가 우표를 대신하고 문자 메시지나 폰이 빠름만을 합창하며 손편지를 대신한다. 자기 자신을 돌아볼 여유도 없이 바쁘게 사는 동안 우리의 영혼은 점점 무뎌간다. 바빠서라기보다 마음에 여유가 없어서 조급하다. 오죽하면 ‘안녕하십니까’라는 인사말보다 ‘많이 바쁘시지요’라고 할까. 인생은 여행이지 단거리 경주가 아니다.
『느린 것이 아름답다』의 저자 칼오노리는 “슬로라이프(slow life)란 게으른 것과 다르며 단지 속도를 늦추는 것이다”라고 했다. 인생의 맛은 다양하다. 허겁지겁 삼키는 것보다 천천히 씹고 음미해야 진미도, 즐거움도 느낀다. 작은 그림 속의 다양한 의미를 감상하며 정성스럽게 입힌 우표와 감성을 원색으로 눌러 쓴 손편지는 시대를 초월한 조화미(調和美)다.
